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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

작성자 허브누리(ip:)

작성일 2008-10-06

조회 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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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이사 때마다 쌀 한 됫박에 불처럼 일어나라고 성냥을
선물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사 때 받은 성냥을 벽장 속에 가득 쌓아 놓으면 한동안
성냥 살 일은 없었답니다.

그런데 성냥하면 떠오르는 노래가 하나 있는데....
'인∼천의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

나이 40을 넘긴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불러봤을 그 시절의
그야말로 국민가요(?)였답니다.

체면을 따지지 않아도 되는 술자리 등에서는 단골로 등장해
수준을 ‘끌어내리는 데’ 일조하면서도 분위기를 띄우는 데는
딱 이었던 묘한 노래였답니다.

구슬픈 곡조에 가사도 저급한 노래가 바로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인데, 여성을 비하한 상스러운 노래말이 들어 있는
이 노래를 굳이 들춰낸 까닭이 있답니다.

인천은 한때 가발, 섬유산업과 함께 대한민국 근대 산업을
일으켰던 선구자 역할을 했던 성냥산업과 여기에 종사했던
여성 근로자의 애환이 서려 있기 때문이랍니다.

1886년 인천에 첫 성냥공장이 생겨났고 1917년 10월에
자본금 50만원(圓)으로 국내 최대 규모의 조선인촌회사
(朝鮮燐寸會社)가 문을 열게 된답니다.

인천 동구 금창동 피카디리 극장 자리 2000여 평 터에 자리잡고
'우록표' '쌍원표' 제품을 생산한 이 회사는 한때 고용인원이
여자 300여명, 남자 100여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하루 평균 2만7천 타, 연간 생산 능력은 7만 상자로 국내
생산 능력이 당시 국내 성냥 소비량의 20%를 차지할 만큼
그야말로 성업이었는데, 

요즘 포철이나 현대자동차를 산업 시찰하는 것처럼 서울이나
지방 학생들이 이 공장을 견학하는 것을 수학 여행의 코스로
삼았을 정도였다고 한답니다.

노래처럼 인천에는 성냥공장도 있었고 거기서 일하는 성냥공장
아가씨도 분명 있었답니다.

1920~1930년대 인천에 있는 성냥 공장들의 생산력은 우리나라
성냥의 70%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고 일부는 중국에 수출하기도
했을 정도로 번창했는데...

이처럼 인천에서 성냥 산업이 발달한 것은 목재, 유황 같은
원자재 수입이 용이했을 뿐만 아니라

개항이 되면서 전국 각지 사람들이 모여들어 노동력이 풍부했기
때문이며, 또한 타 지역에 비해 전력 사정이 비교적 좋았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성냥제조업은 노동 집약적인 산업이었는데..

성냥개비에 인을 붙이거나 성냥을 곽에 넣는 작업은 일일이
사람 손에 의존했다고 한답니다.

정미소에서 돌을 고르던 일밖에 없었던 때인지라 성냥 공장은
여성 고용 창출에 한몫 했으나 고용환경은 극도로 나빴는데,

<인천시사>에 따르면 여직공들은 1만 개의 성냥개비를
붙여야 60전을 손에 쥘 수 있었는데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3시간에 달할 정도였답니다.

여공들에 대한 비인격적인 대우는 말할 것도 없었답니다.

결국 1930년대에는 성냥공장 여공들이 낮은 임금에 항의해
파업을 일으켰는데, 여성 근로자를 비하하는 뜻이 담긴 ‘성냥
공장 아가씨’에는 이처럼 애틋한 사연이 담겨 있답니다.

즉, 이 노래에는 대한민국 근대 산업을 일으켰던 선구자 역할을
했던 성냥산업과 여기에 종사했던 여성 근로자의 애환이 서려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나 국내 산업 발전의 원동력 이자 가난한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인천 동구 일대의 숱한 성냥공장들은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으며,

물론 그 시절의 성냥 공장 아가씨들은 이미 돌아가시거나 고령의
할머니로 살아가시고 있답니다.

허브누리(www.herbnuri.co.kr) &(주)지식을 다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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