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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들이 두려워했던 두 가지?

작성자 허브누리(ip:)

작성일 2011-02-21

조회 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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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삼국사기에 실린 ‘도미(都彌)부인’의 설화에는 백제 사람인
도미부인의 사랑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이 설화는 도미와 도미부인의 간절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또한 도미부인의 뛰어난 정절을 강조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군주로서의 도리를 잃어버린 백제왕인 개로왕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답니다.

개로왕은 많은 실정을 한 국왕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는
무리한 토목공사와 국력낭비로 민심을 저버렸답니다.

그래서, 후일 그가 "백성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해졌으니 비록
위태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기를
즐겨 하겠는가"하고 스스로 후회한 데에서도 잘 드러난답니다.

결국 도미설화는 외면적으로는 '의리가 있는 도미와 용모도 아름답고
정절 또한 높은 그의 부인이, 잔학무도한 개로왕의 온갖 회유와
강압에도 불구하고 끝내 지조를 지키는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백성의 신망을 저버린 군주는 결국 패망할 수밖에
없는 교훈을 강조한 것입니다.

왕조국가에서 대부분의 국왕들은 두 가지의 두려움이 있었는데,
끊임없는 암살음모와 자손이 끊어지는 것이 바로 그것이랍니다.

때문에 매일 침소를 바꾸고 궁궐을 옮겨 다녔으며, 시위군을
강화하였으며 후궁제도를 두어 계속적으로 왕자 출산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을 했답니다.

국왕에게 후손은 많을수록 좋았는데 왕손은 왕실의 위엄과 번성의
상징이요, 종묘사직을 지켜나가는 첩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국왕의 주변에 여자가 많은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조선시대 사냥과 풍류를 즐기고 여색을 탐했다는 이유로 양녕대군을
폐 세자 시킨 태종은 부인 12명에 12남 17녀를 두었을 정도랍니다.

또한 우리가 성군으로 높이 평가하는 세종대왕의 경우에도 6명의
부인에게서 18남 4녀라는 많은 자식을 낳았답니다.

그렇다고 세종을 호색한 군주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답니다.
그 외에도 성종은 12명의 부인에게서 16남 12녀를, 선조는 8명의
부인에게서 14남 11녀를 두었답니다.

즉, 양녕대군이 단순하게 여색을 탐했다는 이유만으로 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국왕이라고 할지라도 무분별한 여성편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는데,

연산군은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는가 하면 향락을 위해 기생들을
궁중으로 끌어들였는데, 그의 패륜행각의 압권은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겁탈하는 종친간의 상간이었답니다.

연산군은 결국 폭군으로 몰려 중종반정으로 쫓겨났답니다.

아무리 후손을 늘려야 하는 국왕도 여자를 가까이 하는 데에
그 한계가 있었던 모양인데, 남의 부인을 겁탈한다든가 종친간의
상간이 그러한 경우였답니다.

양령대군 또한 '어리'라는 정승댁 첩을 빼앗은 사건을 계기로 시중의
여론이 악화되어 폐 세자 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비록 첩이라 할지라도 남의 여자를 빼앗는 것은 인정받기 힘든
반도덕적인 행동으로 비판 받았음을 알 수 있답니다.

허브누리(www.herbnuri.co.kr) &(주)지식을 다함께

첨부파일 헨리4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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